[하루 3분 한국사] 인물 - 고종
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, 고종 – 개혁 군주인가? 무능한 군주인가?
고종(高宗, 1852~1919) 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습니다.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,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.
그러나 그의 통치는 늘 엇갈린 평가를 받습니다.
✔ 개혁을 시도한 군주라는 평가 vs.
❌ 우유부단하고 무능했던 왕이라는 평가
오늘은 고종의 생애, 주요 정책, 그리고 그를 둘러싼 논란을 살펴보며, 그가 한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겠습니다.
👶 고종의 어린 시절과 즉위
- 출생: 1852년 (철종 3년)
- 즉위: 1863년 (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며, 12세에 왕위에 오름)
- 섭정: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버지 흥선대원군(이하 대원군)이 섭정을 맡음
고종은 즉위했지만 정국 운영은 사실상 흥선대원군이 주도했습니다. 대원군은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, 이후 권력을 둘러싼 갈등으로 물러나게 됩니다.
⚔️ 대원군 vs 명성황후, 그리고 고종의 독자적 통치
고종의 통치 초반에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(민비) 사이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습니다.
- 대원군: 강한 왕권, 쇄국 정책 추진
- 명성황후: 개화파를 지원하며 일본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함
1873년, 고종은 대원군을 축출하고 왕권을 직접 행사하기 시작합니다. 그러나 명성황후와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, 고종의 입지는 여전히 제한적이었습니다.
🌏 개항과 근대화 정책 – 고종의 개혁 의지
✅ 1. 강화도 조약 (1876년) – 조선의 문호 개방
일본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 조선은 강화도 조약(1876) 을 체결하며 개항을 하게 됩니다. 이는 조선이 본격적으로 외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계기가 됩니다.
✅ 긍정적 영향: 서구 문물 유입, 근대화의 기회
❌ 부정적 영향: 일본의 경제적 침탈 시작
✅ 2. 근대적 개혁 시도 – 개화 정책
고종은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을 근대 국가로 만들려 했습니다.
- 1880년대 개화 정책: 신식 군대(별기군 창설), 신문 창간, 서양식 학교 설립
- 1883년 박문국 설치: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 발행
- 1884년 우정국 개설: 근대적인 우편 제도 도입
그러나 개혁은 보수 세력과 일본·청나라의 개입으로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.
🔥 내부 갈등과 외세의 침략 – 고종의 위기
⚔️ 1. 갑신정변 (1884년) – 실패한 개혁
급진 개화파(김옥균, 박영효 등)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켰으나,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개화 세력은 몰락합니다. 이후 조선은 다시 청나라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됩니다.
🗡 2. 명성황후 시해 사건 (1895년)
- 1895년,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
- 고종은 일본의 압박을 받으며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음
이후,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는 **‘아관파천(俄館播遷, 1896년)’**을 단행합니다.
🏛 대한제국 선포 (1897년) – 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
1897년, 고종은 조선을 ‘대한제국’으로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합니다. 이는 국제적으로 조선이 자주적인 국가임을 알리고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습니다.
✔ 연호를 광무(光武)로 바꾸고, 서구식 개혁 정책(광무개혁) 추진
❌ 하지만 일본·러시아 등 열강의 압박 속에서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
결국, 대한제국의 개혁은 외세의 침략과 내부 부패로 인해 실패하게 됩니다.
🇯🇵 일제의 압박과 강제 퇴위 (1907년)
🔥 헤이그 특사 사건 (1907년)
고종은 을사조약(1905년, 일본의 보호국화 조약)을 무효화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합니다.
- 특사: 이준, 이상설, 이위종
-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, 조선의 외교적 입지는 더욱 약화됨
-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, 순종(고종의 아들)을 즉위시킴
⚰ 고종의 최후 – 독살설과 대한 독립의 불씨
1907년 강제 퇴위된 고종은 덕수궁(경운궁)에서 유폐된 채 생활하였습니다.
- 1919년 1월 21일,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
- 당시 독살설이 제기되며, 그의 죽음은 3.1운동의 기폭제가 됨
✔ 고종의 장례식(국장)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참석하여 독립의 염원을 표출
✔ 고종의 죽음은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됨
🔎 고종을 둘러싼 논란 – 그는 어떤 왕이었을까?
긍정적 평가 | 부정적 평가 |
근대화를 시도한 개혁 군주 | 우유부단하고 현실 감각이 부족한 왕 |
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자주성을 지키려 함 | 외세에 의존하며 실질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함 |
국제 외교를 통해 조선을 보호하려 함 | 즉위 기간 동안 국권을 잃고 일본에 강제 병합됨 |
고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, 시대적 한계 속에서 제대로 된 개혁을 이루지 못한 군주로 평가됩니다.
🗝️ 마무리하며 – 고종, 실패한 군주인가? 희생양인가?
고종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대한제국을 지키려 노력했지만, 강대국들의 압박 속에서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. 그의 정책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지만, 적어도 조선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을 친 마지막 군주였습니다.
💬 여러분은 고종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? 그는 나라를 지키려 한 개혁 군주였을까요, 아니면 우유부단한 지도자였을까요?